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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의 삶

두문불출55 2016. 10. 23. 15:47

[포커스-이사람]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의 삶
- 불꽃처럼 살다 간 그의 업적을 조명한다 -













지난 8월 10일은 세계적인 육종학자인 우장춘 박사의 서거 57주기이다.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에서는 우장춘 박사의 서거 57주기를 맞아 우장춘 박사의 주요 업적과 우리 농업 과학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8월 23일부터 31일까지 9일간 농촌진흥청 농업과학관에서 ‘우장춘 박사 특별전’을 열었다.
본지에서는 우장춘 박사의 불꽃같은 인생역정과 세계적인 육종학자로서 업적을 재조명해보았다.








비참한 유년기를 거쳐 동경제국대한 농학실과에 진학하다
우장춘 박사의 부친은 구한말 친일부대 대대장이었던 우범선으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했던 인물이다. 사건 후 일본으로 도주하여 '사카이 나카‘라는 일본여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이 바로 우장춘이다.
아버지 우범선은 구한말 대한제국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우장춘이 5살 때 암살당했고, 이때부터 우장춘 가족은 생활고에 시달리며 거지같은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그의 어머니는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 우장춘을 고아원에 맡겼다. 고아원에 들어간 어린 우장춘은 고아원생들의 극심한 괴롭힘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모친은 우장춘을 고아원에 맡긴 후 악착같이 돈을 벌었고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우장춘을 다시 집으로 데려와서 일본 최고의 명문대학인 ‘동경제국대학’ 농학실과에 진학시켰다.


▲ (좌)중앙원예기술원을 방문하여 우장춘 박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다우링 주한 미국대사 내외,
(우) 시험포에서 모내기를 하고 있는 우장춘 박사


우장춘은 1919년 농학실과를 졸업하고 일본 농림성 농업시험장에서 본격적으로 식물과 종자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농업시험장에서 재직하면서 2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1936년 농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럼에도 우장춘 박사는 진급에서 탈락되자 일본 농림성 농업시험장을 떠나게 된다.
농업시험장을 떠난 후 1937년 9월 교토에 있던 다키이 종묘회사의 초대 연구 농장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1945년 9월 사임하기까지 9년간 실용적 육종 연구에 몰두하였고 <농업과 원예>지에 ‘채소의 육종기술’이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환국 후 그 연구 결과들은 채소류 종자 개량의 발판이 되어 한국의 농업을 부흥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 (좌)우장춘 박사 운명하기 3일전에 정부가 수여한 문화포장증, (우) 국립원예특작원에 있는 우장춘 박사 흉상

조국은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을 원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은 1947년부터 농업근대화를 추진하면서 당시 일본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에게 관리를 파견하여 조국에서 일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리고 '한국농업과학연구소'를 설립하여 소장 자리는 우장춘을 위해 비워두었다.
우장춘 박사는 평소 아버지가 조국을 배신한 반역자임을 잘 알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죄값을 자신이 갚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갚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마침 한국에서 일해 달라고 요청이 듣고는 바로 승낙했다. 그는 한국정부에서 우장춘 박사의 가족들의 생활비로 보내준 1백만 엔을 몽땅 털어 한국에서 시험 재배하고 연구할 각종 작물 종자와 육종에 관한 서적, 실험용 기구 등을 구입하는데 모두 사용했다.

그의 연구활동은 한국의 현대농업기술의 기초를 닦았고 국민들은 배고품을 벗어나게 해주었다
1950년 부산을 통해 귀국하였고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 6.25전쟁이 터지면서 그는 52살인데도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한국농업과학연구소(이후 중앙원예기술원 --> 농촌진흥청 원예시험장 --> 현재 국립원예특작과학원으로 개칭)’ 소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소장 자리만 만들어 놓았지 편히 기거할 사택은 없었다. 평소에 입을 옷이 마땅치 않아 우 소장은 각종 행사에 갈 때마다 누더기 외투에 고무신을 끌고 나갔다고 한다.  우장춘 박사는 이런 환경에서도 불평없이 10여년 동안 묵묵히 육종개량 연구에만 전념했다.
당시 미수교국이었던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구입할 수 밖에 없었던 채소 종자 수입의 한계에 벗어나기 위해 채소 교배를 통해 신품종 육성에 주력하였다. 병에 강하고 맛있는 무를 개발하였고, 배추, 양파, 고추, 오이 등 20여 작목을 대상으로 새로운 품종을 만들었다. 그의 육종 기술은 우리가 먹고 있는 대부분의 채소 품종 개발에 현재까지도 이용되고 있다.
전국에서 수집한 재래종 배추와 일본종을 교배하여 무와 배추 20품종을 새롭게 육성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국식품을 대표하는 김치 문화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채소종자 자급 달성 후 바이러스 때문에 감자 수확량이 50~80% 감소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여름철이 서늘하여 병해충에 강한 강원도 대관령에 씨감자 생산단지를 조성하였다. 또한 일본에서 도입한 감귤 품종을 제주도 등에 심어 시험재배 한 결과 오늘날 제주도가 감귤의 대량생산단지가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우장춘 박사는 먹고 사는 것만 해결해 준 것이 아니라 농산물로 경제와 산업을 창출하는 기반까지 닦아 준 은인으로 하늘에서 보내 준 '구원의 천사'였던 것이다.


▲ (좌) 우장춘 박사의 일대기는 여러 종류의 도서로 출판되어 전해지고 있다, (우) 우장춘 박사 특별전'에서 우 박사 연구실 체험장에서 씨없는 수박과 현미경을 들여다 보고 있는 어린이들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우수 품종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연구자
1956년 우장춘 박사는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하였다. 3번에 걸친 수술을 겪으며 박사의 몸은 몰라보게 야위어 갔지만, 한창 실험 중이던 일식이수(一植二收)의 벼를 비닐 봉투에 담아 링거 병이랑 같이 걸어 놓고 관찰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고 한다. 1959년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더 우수한 벼 품종을 만들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정부에서는 우장춘 박사가 운명하기 전에 문화포장을 수여하여 업적을 기렸다. 우장춘 박사는 1959년 8월 10일 향년 61세로 생을 마쳤다.
장례식은 서울 세종로에 있던 경기도청 앞 광장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의 조문이 잇달았다. 유해는 수원에 (구)농촌진흥청내에 안장되었으며 매년 우장춘의 얼을 기리는 추모식이 거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