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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째 가업을 이어가는 전통 옹기 전수자 박성일氏

두문불출55 2017. 10. 3. 14:39

[포커스 - 이 사람]

지역개발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몰린 200여년 역사의 전통 옹기가마 

7대째 가업을 이어가는 전통 옹기 전수자 박성일氏



흙을 구워 만든 옹기는 조상대대로 사용되어 왔다. 뚝배기, 솥, 약탕관, 등잔 등 생활 용기는 물론, 쌀독ㆍ김치독 등과 같은 저장고 역할, 그리고 간장ㆍ된장ㆍ고추장 등을 발효ㆍ저장하는 발효용구 등 다양한 생활도구로서 사용되어 왔다. 또한 독과 항아리가 가득 모여있는 장독대는 선조들이 후손에게 물려준 소중한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충북 청주시에서 7대째 200년간 옹기 굽는 일을 가업으로 이어온 박성일(54)氏는 최근 몇 년간 시름이 깊다. 옹기장인인 부친 박재환(86)옹과 함께 작업해온 전통가마터가 지역의 개발논리에 의해 사라질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2백년 역사의 ‘전통 옹기가마’를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충북도의 문화적 천박함

충북 청주시 오송읍 봉산리 점촌(店村)마을. 이곳은 토기를 굽는 마을이라는 뜻의 점촌이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옛날부터 옹기 굽는 옹기촌으로 유명했다. 


<옹기가마는 구릉지의 경사진 지형을 이용해 설계되었는데, 아랫부분 아궁이에서 불을 지피게 되면, 가마 속 열기가 위로 올라가게 되는 구조이다.>


6월초 이곳은 옹기촌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박氏 부자가 작업하던 옹기 가마 주변에는 오송 제2생명과학단지 조성을 위한 공사가 한창이다. 100만평의 부지에 14,000세대의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인 이곳에는 포크레인과 불도저, 그리고 덤프트럭 등 중장비가 쉼 없이 왕래하는 공사현장이었다. 

공사현장 한 가운데에는 10여 미터 높은 구릉지에 외로운 섬처럼 홀로 솟아있는 옹기가마터가 있었다. 비를 피하기 위해 지붕이 설치되었고 그 안에 벽돌 구조와 틈새는 진흙이 발라진 옹기가마가 있었다. 


<옹기가마는 가마 중간이 무너져 있는 등 보존상태가 좋지 않았다. 가마터를 철거하려는 개발사 직원이 한밤중에 벌인 소행으로 보이지만 물증이 없어 고발이나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이 전통가마는 구릉지의 경사진 지형을 이용해 설계되었는데, 16°로 경사진 아랫부분 아궁이에서 불을 지피게 되면, 가마 속 열기가 위로 올라가게 되는 구조이다. 아궁이부터 굴뚝까지는 20m 가량 되고, 가마 안에 10개의 칸으로 된 칸가마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박성일氏는 칸가마 구조에 대해 “일반적인 통가마는 열기가 한꺼번에 빠져 나가지만, 칸가마는 열기가 가마 안에 오래 머물 수 있어서 1,250℃로 유지에 최적의 시설”이라면서, “전국적으로 10칸 규모의 초대형 가마는 전국에서 유일하기 때문에 보전가치가 높은 문화유산”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곳 옹기가마는 가마 중간이 무너져 있는 등 보존상태가 좋지 않았다. “가마터를 철거하려는 개발사 직원이 한밤중에 벌인 소행”이라면서 박氏는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어 고발이나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한다. 때문에 이 옹기 가마터에서는 더 이상 옹기제작은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현재 박氏는 개발사인 충북개발공사와 가마터에 대한 보상금 소송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한국 내셔널트러스트는 오송 봉산리 옹가가마터의 문화ㆍ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2014년 내셔널트러스트 보전대상 문화유산으로 선정하였다.>


개발주최인 충북개발공사와 외로운 소송중인 옹기장인

문제의 발단은 점촌마을 옹기가마가 민선 5기 충북도 핵심 현안인 오송 제2생명과학단지가 들어설 곳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개발에 앞서 충북도는 2008년 오송읍 일대 문화재 지표조사를 하면서 점촌마을을 조사대상에서 누락시켰고, 그 결과를 시행사인 충북개발공사를 통해 2010년에 발표했다. 박氏와 가족들은 관계기관을 찾아다니며 옹기가마의 보존가치에 대해 알렸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7대에 걸친 선조의 삶터를 지키기 위해 이시종 충북도지사 앞으로 탄원서도 제출했지만 돌아온 것은 담당자와 상의하라는 무성의한 답변”이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충북도가 문화재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2003년에는 부친 박재환옹을 ‘200년 역사의 가마터와 옹기 기술이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다’며 충북 무형문화재 제12호 옹기장인으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충북도의 앞뒤가 다른 행보는 울산시가 2010년부터 울주군 외고산마을을 국내 최대 옹기마을로 조성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울산시는 1950년대 옹기장인 허덕만氏가 울주군 외고산마을에 정착한 것을 근거로 국내 최대 옹기마을을 만들어 지역 최대 문화상품을 만들었다. 반면에 충북도는 200년의 역사를 가진 옹기터와 천주교 박해 현장을 무시하고 오직 개발 논리만을 앞세워 문화유산을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문화적 천박함’을 보여주고 있다. 


  

  

<박재환옹은 생계를 위해 11살 때부터 독 짓는 일에 뛰어들어 남다른 노력으로 옹기 빚는 기술을 연마하였고, 더 나은 기술을 배우기 위해 전국의 옹기 기술자를 찾아 고수의 비법들을 익혔다. 그리고 온갖 어려운 상황을 견뎌내면서 2003년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12호 옹기장으로 선정되었다.>


박해를 피해 숨어살며 옹기 구웠던 천주교인

점촌마을 옹기촌과 박성일氏 가문과의 인연은 200여년전 박氏의 7대조 조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조선시대 말 천주교 박해 때 박성일氏의 7대조 할아버지는 천주교 신도라는 이유로 문중에서 퇴출당한 뒤 점촌마을로 숨어들었다. 당시에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할 수 있는 일은 산 속에 들어가 화전을 일구거나 양잠을 하거나 옹기를 굽는 일뿐이었다. 박씨 선조들은 옹기촌에 정착해서 옹기점을 하며 신앙을 지켜왔다. 

이곳에 있는 가마터는 천주교 신앙과 함께 유지되어 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한불수교(1886년) 이후 프랑스 선교사가 세웠던 벌미공소(벌미마을 작은성당)가 1960년 무렵까지 이곳에 있었고, 공소 바로 밑에 박氏 가문이 작업하던 옹기가마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옹기장인 박재환옹이 제작한 옹기에는 ‘무형문화재 박재환’이라는 낙관을 찍어 소장 가치를 높였다.>


문화유산에 대한 연구와 보전운동을 펼치는 한국 내셔널트러스트도 오송 봉산리 옹가가마터의 문화ㆍ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2014년 내셔널트러스트 보전대상 문화유산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11살 심부름꾼으로 시작해서 옹기 장인이 된 부친 박재환옹

박氏의 부친인 박재환옹 또한 같은 길을 걸었다. 생계를 위해 11살 때부터 독 짓는 일에 뛰어들어 남다른 노력으로 옹기 빚는 기술을 연마했다. 고온의 가마 온도 유지법이나 점토 정제법 등 더 나은 기술을 배우기 위해 식솔들을 이끌고 전국의 옹기 기술자를 찾아다니며 고수의 비법들을 익혀갔다. 

10여년의 기술 연마 후 다시 고향을 찾은 박재황옹은 일류 도공에게 배운 기법을 이용해 장독, 술 항아리 등을 척척 만들어내면서 가족들은 ‘이제는 부자 될 일만 남았다’고 기뻐했지만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산림보호를 위해 입산금지 명령을 내리면서 나무를 원료로 쓸 수 없었고, 플라스틱 용기와 양은 그릇 등 값싸고 질 좋은 용기가 대량 공급되면서 옹기는 더 이상 소중한 것이 아닌 찬밥 신세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박재환옹은 이런 시대적 변화로 인한 시련과 어려움, 가난을 온 몸으로 버텨내면서 긴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러자 마침내 세상은 다시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2003년 충북도가 무형문화재 12호 옹기장으로 선정한데 이어 2009년에는 캐나다에서 열린 세계무형문화재 작품전에 똥장군 두 점을 출품해 큰 관심을 받았다. 또 2010년에는 울산 세계옹기문화엑스포 광고모델로 선정돼 봉산리 가마에서 엑스포 성화의 첫 불을 밝히는 영광까지 누렸다. 


<박재환옹의 3남 박성일氏는 부친이 무형문화재로 선정될 무렵 가업을 잇기 위해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부친과 함께 옹기 제작의 명맥을 잇고 있다.>


새로운 작업장에서 7대째 가업을 잇는 박성일氏 

박재환옹의 3남 박성일氏가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가업을 잇기 시작한 것도 부친께서 무형문화재로 선정되면서부터다. 

어렸을 때부터 작업장에서 불 지피는 일, 점토 섞는 일 등 대부분의 옹기제작을 도왔던 박氏는 어린 마음에 옹기 만드는 일이 너무 싫었다.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직장생활도 했다. 그러나 철이 들어가면서 옹기에 대한 애정이 스물스물 올라와 결국은 고향으로 돌아와 가업을 잇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어릴 적부터 가마터에서 보아왔고 줄곧 해왔던 일들이라 생각보다 빨리 감각을 익히고 숙달되어갔다.


청주시 오송읍 정중리에 박성일氏가 옹기공장과 가마터로 사용할 새 터전을 마련했다. 직장다닐 때 벌어서 매입한 이 곳은 산등성이에 위치해 개발의 염려가 없으니 안심이 된다. 점촌마을에서 작업했던 항아리와 독 1,000여점을 이 터에 옮겨놓았다. 

재판이 끝나면 옹기공장을 건립에 온 힘을 쓸 예정이라면서, 이곳에 부친 박재환옹의 작품 전시관과 함께 옹기 체험관도 운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아울러 인근 도시인 세종시가 향후에 100여개의 학교가 들어설 예정이어서 학생과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옹기 카페와 전통문화 체험관을 운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오송읍 정중리에 새롭게 자리잡은 옹기공장터. 박성일氏는 이곳에 신규 가마터와 함께 부친의 작품 전시관과 옹기 체험장을 조성할 계획이다.>


최근 건강식품으로 효소가 각광을 받으면서 옹기의 인기도 치솟고 있어 전통옹기의 맥을 이어 희망의 불씨가 된다. 비록 아쉽게도 200여년간 조상대대로 이어온 전통 가마터는 잃게 되었지만, 이번 사태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미래적 자산으로 전통 옹기의 역사를 지켜내는 옹기장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게재 : 월간 상업농경영 2017년 7월호